「……지상과 하늘이 겹쳐지는 곳. 별을 볼 수 있는 곳. 세상의 끝인 그 곳은 사람들은 '텐시'라고 칭한다. 노토스 대륙 서방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에 따르면 낮동안 신의 대리자로서 인간을 감시한 태양은 텐시에서 잠이 든다고 한다. 페지론 어(語)로 '꽃이 떨어지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 파생된 텐시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후대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그 위치가 서녘에서 북녘의 지평선으로 변한다. 어느새 텐시는 태양이 저무는 곳이 아닌 '세계가 저물어가는' 곳으로 그 뜻이 바뀌었다. 9월 현재 바론트 제국의 북방요새도시 레노우의 거주인들은 그들이 근무기간 내내 마주보고 있는 하얀 산맥을 넘으면 텐시가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다.……」
──<노토스(Notos)민간신화연감> 104호, 1399년 9월
푸드득, 무언가가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 위를 내딛는 걸음을 멈춘 유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잿빛 구름 아래로, 인기척을 느낀 갈까마귀 무리가 일제히 날아오른다. 허공에 흩날리는 검은 깃털은 유즈의 눈 앞을 교차하며 미끄러진다. 고동색 후드를 깊숙히 눌러쓴 유즈는 새들의 군무를 눈으로 쫓는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들어찬 숲 너머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앞머리칼 사이로 눈을 가느다랗게 찡그린 유즈는 한참동안 움직일 줄을 모른다. 과연 선지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유즈의 등 뒤에서 동행하는 자들은, 제 키만한 지팡이를 쥐고 어딘가를 올려다보는 소녀를 끈기있게 기다린다.
"……서두릅시다."
잠시 후, 후드를 벗으며 유즈는 말했다
"조만간 얼음비가 내리겠어요. 그림자가 길어지면 괴로워집니다. 하늘은 아직 밝으니, 걸을 수 있을 때 부지런히 걸어가야만 합니다."
차가운 북풍이 땀에 젖은 소녀의 하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오한에 몸을 가볍게 떤 유즈는 뒷머리에 짧게 올려묶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다듬었다. 그런 유즈의 옆으로 한 사람이 다가간다.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짙은 밤색 로브로 몸을 감싼 사내였다. 허리를 숙여 유즈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도시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아이보리빛 머리카락을 끈으로 단단히 묶으며 유즈는 대답한다.
"이 정도로 계속 걸어가면 반나절입니다."
"오늘 잠은 서리없이 지붕 아래에서 잘 수 있겠군."
"여관에서 냄새나는 우리를 기꺼이 환대해준다면 가능하겠지요."라 말하는 유즈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후드 바깥으로 드러나는 얼굴은, 언뜻 보면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제국군의 정보망이 우리의 발걸음보다 느리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티론 백작. 연기는 확인했습니다?"
유즈의 질문에, 아티론은 갈색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신음했다.
"봉화는 올라왔네. 그대의 말대로 두 줄기 이상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통신입니다. 안심하세요."
"선지자인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안심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아티론의 얼굴은 복잡한 표정이 떠올라있다.
건국 이후 단 한 차례도 타국과의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제국 바론트는 기본적으로 전령을 이용한 연락 체계를 갖추고 있다. 적의 영토로 진격하면서 봉화를 사용할 만큼 그들은 대담하지는 않았고, 매달 지도를 새로이 그리는 국경보다는 안정된 내륙 수도권에서도 아직 봉화를 통한 정보 전달은 초보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 수도에서 국경으로 복잡한 지시사항을 내릴 수는 없어도 사전에 미리 약속해둔 대로 연기를 올려보내면 경비 태세 정도는 손쉽게 조절할 수 있다. 황실 측에서 자신들을 붙잡을 마음만 먹었으면 진작에 북방지역은 강력하게 통제될 것일 터였다.
"──생각보다 경비가 너무 허술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저벅 저벅. 유즈는 눈이 쌓인 들길에 발자국을 새겨나간다. 체구는 작아도 걸음은 빠른 편이다. 유즈의 뒤로 갈색 로브의 무리가 줄을 지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티론은 유즈의 곁에서 발을 맞추었다. 그의 서툰 종종걸음에 유즈는 살짝 웃고는 주위 일행의 귀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아직 대집행관 지하 홀이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한창 증거를 찾느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을거란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면, 황제는 당신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교라면 치를 떠는 그들도 일개 백작을 추적하는 것과 키르와의 전쟁 중 어느 쪽이 중대사일지는 현명하게 판단할 겁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금언에 따르자면 선지자는 두 가지의 진실을 말한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그리 달가운 말은 아니었기에 아티론은 끌끌 혀를 찼다.
"나를 무시한다니 의외이군. 느긋한 황제 녀석의 엉덩이를 눈물나게 걷어차야 겠어."
턱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는 아티론이 내뱉는 말에 유즈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후훗, 잘못하면 백작이 그 큼지막한 엉덩이에 파묻힐 수 있습니다."
"…어이. 그 말도 진실인가?"
"오랜 걸음에 지친 소녀의 철없는 농담일 뿐이예요."
선지자의 무서운 말에 정색하고 되물어본 아티론은, 나긋나긋한 유즈의 어조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황량한 풍경을 향하며 먼저 앞서나간다. 어느덧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숲을 벗어나 검정 십자가가 늘어진 폐허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폐허의 가운데에는 아주 오래된 과거에 허물어진 성벽의 잔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천매암으로 쌓인 성벽의 관문 사이로, 거대한 석조물이 하늘로 솟아있다.
흑단 지팡이로 후드를 슬쩍 밀어올린 유즈는 그것을 올려다 본다. 하부에서 상부로 치솟는 기둥을 따라 둥그스름한 홈이 패여있다. 기둥의 끝과 끝부리가 매듬어지는 아치 상단은 반파되어 원형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원근감이 모호해질 정도의 크기를 지닌 건물은, 내륙 수도권에서는 보기 힘든 적잖이 오래된 건축양식이다.
소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입김이 엷게 흩어진다.
"보에라스 왕조 후기 양식입니다. 오백 년은 족히 되었군요."
제국 수도에서조차 볼 수 없는 옛 석조물의 잔해에 아티론은 할 말을 잃었다. 조용히 유즈의 등 뒤를 따르고 있던 백작의 일행들도 그 풍경에 자그마한 탄성을 낸다. 여기서 잠시 휴식이라고 그들에게 말한 뒤, 아티론은 폐허 속으로 먼저 걸어가려는 유즈를 뒤쫓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진 듯 하네. 안 그런가?"
"네. 제가 반나절 거리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국경은 잠깐이면 도착합니다. 그 이후에는 백작의 수완에 달려 있습니다. 바른 말만 하는 꼬맹이 선지자는 어른의 세계에서는 의외로 쓸모가 없으니까요."
"아티론 가문이 제국에게 등을 돌리게 한 계기를 마련한 건 당신 아닌가. 그런 말을 하면 자네만을 믿고 있는 내가 바보가 되어버린다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유즈가 지팡이 끝으로 아티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가는 말뜻은 심각했지만 둘의 표정은 조금도 어둡지 않다. 여태까지 내륙 수도권에서 벗어난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은 두 가지의 진실을 말한다. 그러니 고민하고 또 고민할지어다. 선지자가 너희에게 미칠 힘은 물 한 방울일 뿐이리니.> 백작도 알고 있는 말이죠?"
"어렸을 때 가정교사에게 혼나가면서 지겹게 외었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는 씩 웃으며 소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나는 내 생각으로 결정하고 행동한다. 당신은 자신의 친구를 도와주는 조건을 붙여서 내게 협조하고 있고. 일시적인 동맹 관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당신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 말 그대로입니다. 백작에게 있어서 저는 물 한 방울일 뿐입니다. 어디로 흘러가든지 제가 막을 여력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유즈는 무너진 돌담 위에 지팡이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굽혀 무언가를 주섬주섬 양 손에 모은다.
"바른 길을 선택하는 선지자가 올라탄 흐름이, 바로 당신입니다. 아티론 백작."
소녀의 말은 짧았지만 아티론이 거기에 담겨있는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신의 대리인이 누군가와 함께 행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뜻과 신의 뜻이 동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만큼 선지자의 두 발은 항상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선지자가 아티론, 바로 자신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비록 그가 여러 고문에서 보아왔던 선지자와는 심하게 다른 외모였지만. 허연 수염이 땅에 닿도록 나이를 먹은 노인이 아니라, 그와 매우 가까웠던 사람과 닮았다.
"그러니까 긴장 푸시죠. 우리는 레노우에 무사히 도착할 거예요."
그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뭉치를 아티론에게 던졌다. 아티론은 상반신을 살짝 비틀어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품 가득히 눈뭉치를 끌어안고 있는 유즈를,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목적지를 가벼이 입에 올리지 말게."
"아……죄송합니다."
이번 일을 성공할 확신이 든다고 할지라도, 느긋하게 유즈와 눈싸움을 할 만큼 아티론의 긴장이 풀어진 건 아니다. 그는 풀이 죽은 유즈를 뒤로 한 채 일행들에게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지팡이를 쥐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유즈의 어깨가 축 처져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고비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여러가지 묻고 싶은 말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더라도, 지금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아티론 백작은, 노토스 대륙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국가이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론트 제국의 내륙 수도권을 점령해야 한다.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부하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건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되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번 일은 성공해야만 한다.
'나라면 할 수 있어. 해내야만 한다.'
아티론은 기운 빠진 유즈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마음 속으로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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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
LESS의 잡담이었습니다.
ps) 여기 텍스트큐브에 올리는 토막글은 딱히 하나의 줄거리로 연재하는 게 아니예요. 그냥 자유롭게 글을 쓰면서 창작욕을 해소하는 겁니다. 그림 하나 띄워놓고 거기에 맞는 글을 쓰면 필력이 상승하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잔머리로 해 보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