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31일 수요일

[감상]아이언 하트 ─ 이금영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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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놀러온 플레이보이 대학생 제지환은 밤바다에서 우연히 ‘알몸의 소녀’와 조우한다.
이름도 없이 자신을 ‘코드네임 GOH-00’ 라고 소개하는 소녀. 배가 고파 쓰러진 그녀를
지환이 측은한 마음이 빵을 사 먹여주고 소녀는 고맙다고 인사하곤 계속 졸졸 지환을
따라다닌다. 자신의 정체를 알았으니 지환을 죽여야 한다는 소녀. 지환이 짜증을 내려
는 순간, 갑자기 금발의 트윈테일 소녀 ‘라벤다’가 나타나 외쳤다.


“너 도대체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변태야!”

지환을 죽이려는 알몸소녀와 그것을 막아서는 라벤다. 지환의 눈 앞에서 두 소녀는 빛과
함께 기계장갑을 소환해 변신하고 메카닉과 융합된 소녀들의 싸움에 휘말려 지환은 그만
기억을 잃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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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하트'의 감상 키워드: 메카미소녀, 액션, 츠...츤데레, 전지적 작가 시점


☆시드노벨 공모전 아홉 번째 입선작인 '아이언 하트'입니다. 넵. 약간 논란이 되었던 광고카피와는 다르게 전형적인 SF미소녀배틀활극입니다. 허공에서 나타난 UTS로 완전무장한 히로인들이 묵직한 메카닉 장갑을 휘두르며 불꽃 튀기는 전투를 펼칩니다. 과학적인 포격소녀(...)라고 하는 비유가 괜찮으려나 모르겠네요.


☆넷상 연재시에도 화제가 된 점이지만, [아이언하트]는 액션이 호쾌한 라이트노벨입니다. 예전 정소환의 경우는 기투투결 덕분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신나게 까였지만, 아이언하트는 적당한 완급조절이 되어있어서 그러한 점은 문제되지 않겠네요. 그리고 캐릭터 역시 모에코드에 맞추어져 라이트노벨 독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설정과 고유명사의 등장도 아슬아슬한 선에서 자제되어 있기 때문에 읽다가 책덮는 일은 없을 겁니다. 중요 키워드인 마음(Heart)이 소설을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관통하고 있는 점도─약간 식상한 면은 없지 않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움직였는가'하는 독자들의 무의식적인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설정의 핍진성이 다소 미비하다는 점입니다. 지구와 화성 사이에서 계급갈등에 의한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왜 지구보다 상대적으로 약소그룹인 화성이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는가. 소설을 보는 것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문제이지만, SF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만큼 이에 합당한 설정 완성도가 필요합니다. SF팬이 본다면 여러 부분이 눈에 밟힐 수도 있다는게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앞으로 소설이 전개되면서 풀릴 수 있는 의문점이기는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 보이는 과학적 오류때문에 SF 특유의 매력이 반감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2권에서는 이러한 점을 보강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이 정도로 담백하게 감상글을 적을 수 밖에 없겠네요.

LESS의 감상이었습니다.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벼랑 위의 포뇨'를 보면서

 

극장 불 어두워지고 스크린이 밝아지는 순간

 

'이..인면어..'라는 단어가 갑자기 툭하고 떠올랐음.

 

저 귀엽고 깜찍한 뽀뇨가 인면어라니!!

 

연상되는 이미지부터 시작해서 어감까지 총체적으로 이상하잖아요!!

 

입이 근질근질거려서 옆에 앉은 모모 씨에게 말할까 말까 갈등하는 도중에

 

극중에서 왠 할머니가 히이익 기겁을 하며 기어이 "인면어"라는 단어를 뱉어내더군여.

 

왜 제가 다 기쁘던지.

 

LESS의 잡담이었습니다.

 

ps)이 정도는 스포일러 아니죠?

2008년 12월 27일 토요일

조선시대 풍 '늑대와 향신료'


노란서(盧蘭西)는 투박하게 생긴 검붉은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 콧 속을 후벼파는 비린내가 훅 끼쳐온다. 뱃속에서 욕지기가 훅 솟구치지만, 이 정도를 표정 관리하지 못하면 상인 자격이 없다.
"이것이 젓갈이라는 겁니까?
태연하게 항아리에서 한 발짝 물러서면서 노란서는 허리가 굽은 상인에게 물었다.
손등에 하얀 소금기가 앉은 초로의 상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내륙 지방까지 날생선들을 운반하면 사흘도 지나지 않아 못쓰게 되어버린다네. 그러기에 이렇게 소금물에 절여서 나르는 거지. 장마철만 넘긴다면 상품가치는 어지간해서 떨어지지 않으니까."
"호오. 그렇군요."라고 짧게 대답하며 노란서는 머릿속으로 젓갈을 이용해서 이윤을 남길 수 있는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필시 젓갈의 원가격은 아주 헐값일 것이다. 바닷가에 가면 팔아봤자 수지가 남지 않아서 해안가 주민들이 보존 식량으로 해산물을 말리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다. 겨울철에 짚과 얼음을 섞은 이동틀로 운반하여 한양에 팔리는 신선한 생선은 그야말로 그 가격이 하늘을 찌르지만, 주위에 넘치는게 날생선인 해안지역에서는 지나치게 값이 저평가되어 있다.
하물며 생선이 싸게 팔리는 지역인데, 갯벌에서 돌처럼 흔하게 굴러다니는 해산물의 값이야 말할 것도 없다.
비록 젓갈에 들어가는 소금의 가격에 따라서 부르는게 값이 될 수도 있지만, 금전 순환이 느린 호남지방에서 굳이 황해의 비싼 천일염을 이용해 젓갈을 만들 리는 없다. 아마도 바닷물을 항아리에 담은 뒤 자연증발을 시킬 것이다.
어느 정도의 불순물은, 눈물이 핑 돌 만큼 짜디짠 소금기에 가려진다.
"이 항아리 하나 가격은 얼마인가요?"
"하나에 석 냥. 둘에 다섯 냥으로 쳐주지."
"너무 비싼데요."
충청도 내륙으로 가면 필시 남는 장사일 것이다. 이득이 보는 장사인 줄 뻔히 알면서도 노란서는 짐짓 뜸을 들인다.
"두 항아리를 살 테니 넉 냥 세 전으로 해주시죠."
"넉 냥 닷 전"
"석 전 오 푼."
손가락을 세 개 펼쳐보이며 노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의식중에 상인은 덩달아 고개를 상하로 흔든 뒤, 마치 주막에 깜작 짐보따리를 놔두고 온 장돌뱅이 표정을 짓는다.
 그로서는 넉 냥에 타협을 볼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란서의 조건에 이미 동의해버린 뒤였다.
사농공상 중 가장 천히 여겨지는 상인이라고 할 지라도, 간단한 구두약속의 신뢰는 어지간한 사대부 문서계약을 뛰어넘는다.
별 생각없는 행동이라도 장사치로서의 자존심이 용서치 않는 것이다.
"크읏. 알겠네."
새파란 외지인과 거래를 쉽게 하리라 생각하던 그에게는 예상치 못한 낭패이겠지. 노란서는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상인이 거래 상대방의 행동을 별 생각없이 따라한다는 습관을 이용한 비장의 무기이다.
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할 만큼 조선의 장사치는 만만하지 않다는게 단점이지만.
"그렇다면 대금은 건륭통보로."
"그 쪽이 좋겠지."
청국에서 거래되는 건륭통보는 전국 어딜 가더라도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다.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폐일수록 위폐일 가능성이 큰 만큼, 단순 소매라면 모를까 상인끼리의 거래에서는 은근히 당일전을 무시하는 분위기다.
눈치있는 노란서의 태도에 젓갈 상인의 표정은 조금 밝아진다. 노란서 역시 합당한 가격에 매매했으니 얼굴의 긴장이 다소나마 풀어진다.
바로 옆에서 김호로가 자신의 발등을 짓눌러밟기 전에는.
"아아, 죄송하옵니다. 나으리."
마치 현기증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김호로의 허리가 무너져내린다. 막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려던 노란서는 급히 호로의 어깨를 붙잡았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젓갈 상인은 혀를 끌끌 찬다.
"거 처자가 너무 무리한 듯 한데, 저기 나무 그늘에 앉히고 오시구려."
"거래 중에 이거 죄송합니다."
노란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몹시 기분이 안좋은 양 고개를 푹 숙인 호로를 부축하였다. 젓갈 수레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봐, 당신."
풀바람 소리에 묻힌 김호로의 목소리가 옆에서 어깨를 빌려주는 노란서의 귀에 겨우 들려온다.
"저걸 정말로 그 가격에 살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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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써 봤습니다.

근데 심심해서 메모장에 끄적이다보니, 왠 장편 분량의 플롯이 튀어나오네요.

우왕ㅋ굳ㅋ

LESS의 토막글이었습니다.

2008년 12월 25일 목요일

크리스마스 잡담

 

1. 작년 이맘 때에는 분명히 올해보다 즐거웠을 겁니다. 1년 만에 맛보게 되는 정시생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군요. 마감보다 하루 먼저 원서를 묻어두고 보니, 하룻밤 사이에 지원자가 눈돌아가게 폭주했습니다. "아우 너님들은 이 경쟁율이 눈에 안보이나여? 다른 학교도 많은데 이 쪽으로 오는 이유가 뭔가여? 지금 5:1 넘어가서 러시안룰렛 황천길 티켓 수준으로 합격 확률이 점점 낮아지는데 왜 여기에 원서를 넣나여?"라고 모니터 붙잡고 으롸롸라 화를 내어봤자, 이미 가나다군 원서는 다 써버렸고....

 

2.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렇게 심란하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크리스마스는 온가족이 함께 바다로 드라이브를 갔습니다. 바다가 그리 먼 지방은 아닌지라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습니다. 처음 집에서 나설 때는 N수생되기VS고자되기 스트레스에 제가 생각해도 저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지만, 한 손에 먹을 것을 한 보따리 쥐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마음 속이 상쾌해졌습니다. 차 안에서 별다른 심각한 말이 오간 건 아니었어요. 그냥 천원짜리 뻥튀기를 우적우적 먹으면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해라(...)"는, 어찌보면 간단한 말들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운이 나다니, 참 미스테리한 일이죠. 이래서 가족이 좋은건가 봅니다.

 

3. 매일 최소한 30분은 글을 쓰는데 투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순식간에 2009년이고, 지금은 올해인 2008년이 그때가 되면 작년이 되어버립니다. 못 이룬 올해목표를 내년으로 이월하면 감당이 안되죠. 넵. 문제는 그럴싸한 습작을 하나 완성한다는 걸 아직 못 이뤘다는 겁니다. 내년에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깎을 수도 있지만 운이 좋아서 대학교에 다시 합격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를 대비해서라도 미리미리 글을 써야겠죠. 아니, 생각해보면 미리미리가 아니라 엄청 늦은거군여. 반성 반성.

 

LESS의 잡담이었습니다.

2008년 12월 24일 수요일

그림과 함께하는 토막글 2

 

「…지상과 하늘이 겹쳐지는 곳. 별을 볼 수 있는 곳. 세상의 끝인 그 곳은 사람들은 '텐시'라고 칭한다. 노토스 대륙 서방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에 따르면 낮동안 신의 대리자로서 인간을 감시한 태양은 텐시에서 잠이 든다고 한다. 페지론 어(語)로 '꽃이 떨어지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 파생된 텐시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후대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그 위치가 서녘에서 북녘의 지평선으로 변한다. 어느새 텐시는 태양이 저무는 곳이 아닌 '세계가 저물어가는' 곳으로 그 뜻이 바뀌었다. 9월 현재 바론트 제국의 북방요새도시 레노우의 거주인들은 그들이 근무기간 내내 마주보고 있는 하얀 산맥을 넘으면 텐시가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다.

 

──<노토스(Notos)민간신화연감> 104호, 1399년 9월

 

푸드득, 무언가가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 위를 내딛는 걸음을 멈춘 유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잿빛 구름 아래로, 인기척을 느낀 갈까마귀 무리가 일제히 날아오른다. 허공에 흩날리는 검은 깃털은 유즈의 눈 앞을 교차하며 미끄러진다. 고동색 후드를 깊숙히 눌러쓴 유즈는 새들의 군무를 눈으로 쫓는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들어찬 숲 너머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앞머리칼 사이로 눈을 가느다랗게 찡그린 유즈는 한참동안 움직일 줄을 모른다. 과연 선지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유즈의 등 뒤에서 동행하는 자들은, 제 키만한 지팡이를 쥐고 어딘가를 올려다보는 소녀를 끈기있게 기다린다.

"……서두릅시다."

잠시 후, 후드를 벗으며 유즈는 말했다

"조만간 얼음비가 내리겠어요. 그림자가 길어지면 괴로워집니다. 하늘은 아직 밝으니, 걸을 수 있을 때 부지런히 걸어가야만 합니다."

차가운 북풍이 땀에 젖은 소녀의 하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오한에 몸을 가볍게 떤 유즈는 뒷머리에 짧게 올려묶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다듬었다. 그런 유즈의 옆으로 한 사람이 다가간다.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짙은 밤색 로브로 몸을 감싼 사내였다. 허리를 숙여 유즈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도시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아이보리빛 머리카락을 끈으로 단단히 묶으며 유즈는 대답한다.

"이 정도로 계속 걸어가면 반나절입니다."

"오늘 잠은 서리없이 지붕 아래에서 잘 수 있겠군."

"여관에서 냄새나는 우리를 기꺼이 환대해준다면 가능하겠지요."라 말하는 유즈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후드 바깥으로 드러나는 얼굴은, 언뜻 보면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제국군의 정보망이 우리의 발걸음보다 느리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티론 백작. 연기는 확인했습니다?"

유즈의 질문에, 아티론은 갈색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신음했다.

"봉화는 올라왔네. 그대의 말대로 두 줄기 이상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통신입니다. 안심하세요."

"선지자인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안심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아티론의 얼굴은 복잡한 표정이 떠올라있다.

건국 이후 단 한 차례도 타국과의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제국 바론트는 기본적으로 전령을 이용한 연락 체계를 갖추고 있다. 적의 영토로 진격하면서 봉화를 사용할 만큼 그들은 대담하지는 않았고, 매달 지도를 새로이 그리는 국경보다는 안정된 내륙 수도권에서도 아직 봉화를 통한 정보 전달은 초보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 수도에서 국경으로 복잡한 지시사항을 내릴 수는 없어도 사전에 미리 약속해둔 대로 연기를 올려보내면 경비 태세 정도는 손쉽게 조절할 수 있다. 황실 측에서 자신들을 붙잡을 마음만 먹었으면 진작에 북방지역은 강력하게 통제될 것일 터였다.

"──생각보다 경비가 너무 허술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저벅 저벅. 유즈는 눈이 쌓인 들길에 발자국을 새겨나간다. 체구는 작아도 걸음은 빠른 편이다. 유즈의 뒤로 갈색 로브의 무리가 줄을 지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티론은 유즈의 곁에서 발을 맞추었다. 그의 서툰 종종걸음에 유즈는 살짝 웃고는 주위 일행의 귀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아직 대집행관 지하 홀이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한창 증거를 찾느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을거란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면, 황제는 당신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교라면 치를 떠는 그들도 일개 백작을 추적하는 것과 키르와의 전쟁 중 어느 쪽이 중대사일지는 현명하게 판단할 겁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금언에 따르자면 선지자는 두 가지의 진실을 말한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그리 달가운 말은 아니었기에 아티론은 끌끌 혀를 찼다.

"나를 무시한다니 의외이군. 느긋한 황제 녀석의 엉덩이를 눈물나게 걷어차야 겠어."

턱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는 아티론이 내뱉는 말에 유즈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후훗, 잘못하면 백작이 그 큼지막한 엉덩이에 파묻힐 수 있습니다."

"…어이. 그 말도 진실인가?"

"오랜 걸음에 지친 소녀의 철없는 농담일 뿐이예요."

선지자의 무서운 말에 정색하고 되물어본 아티론은, 나긋나긋한 유즈의 어조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황량한 풍경을 향하며 먼저 앞서나간다. 어느덧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숲을 벗어나 검정 십자가가 늘어진 폐허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폐허의 가운데에는 아주 오래된 과거에 허물어진 성벽의 잔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천매암으로 쌓인 성벽의 관문 사이로, 거대한 석조물이 하늘로 솟아있다. 

흑단 지팡이로 후드를 슬쩍 밀어올린 유즈는 그것을 올려다 본다. 하부에서 상부로 치솟는 기둥을 따라 둥그스름한 홈이 패여있다. 기둥의 끝과 끝부리가 매듬어지는 아치 상단은 반파되어 원형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원근감이 모호해질 정도의 크기를 지닌 건물은, 내륙 수도권에서는 보기 힘든 적잖이 오래된 건축양식이다.

소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입김이 엷게 흩어진다.

"보에라스 왕조 후기 양식입니다. 오백 년은 족히 되었군요."

제국 수도에서조차 볼 수 없는 옛 석조물의 잔해에 아티론은 할 말을 잃었다. 조용히 유즈의 등 뒤를 따르고 있던 백작의 일행들도 그 풍경에 자그마한 탄성을 낸다. 여기서 잠시 휴식이라고 그들에게 말한 뒤, 아티론은 폐허 속으로 먼저 걸어가려는 유즈를 뒤쫓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진 듯 하네. 안 그런가?"

"네. 제가 반나절 거리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국경은 잠깐이면 도착합니다. 그 이후에는 백작의 수완에 달려 있습니다. 바른 말만 하는 꼬맹이 선지자는 어른의 세계에서는 의외로 쓸모가 없으니까요."

"아티론 가문이 제국에게 등을 돌리게 한 계기를 마련한 건 당신 아닌가. 그런 말을 하면 자네만을 믿고 있는 내가 바보가 되어버린다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유즈가 지팡이 끝으로 아티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가는 말뜻은 심각했지만 둘의 표정은 조금도 어둡지 않다. 여태까지 내륙 수도권에서 벗어난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은 두 가지의 진실을 말한다. 그러니 고민하고 또 고민할지어다. 선지자가 너희에게 미칠 힘은 물 한 방울일 뿐이리니.> 백작도 알고 있는 말이죠?"

"어렸을 때 가정교사에게 혼나가면서 지겹게 외었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는 씩 웃으며 소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나는 내 생각으로 결정하고 행동한다. 당신은 자신의 친구를 도와주는 조건을 붙여서 내게 협조하고 있고. 일시적인 동맹 관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당신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 말 그대로입니다. 백작에게 있어서 저는 물 한 방울일 뿐입니다. 어디로 흘러가든지 제가 막을 여력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유즈는 무너진 돌담 위에 지팡이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굽혀 무언가를 주섬주섬 양 손에 모은다.

"바른 길을 선택하는 선지자가 올라탄 흐름이, 바로 당신입니다. 아티론 백작."

소녀의 말은 짧았지만 아티론이 거기에 담겨있는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신의 대리인이 누군가와 함께 행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뜻과 신의 뜻이 동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만큼 선지자의 두 발은 항상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선지자가 아티론, 바로 자신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비록 그가 여러 고문에서 보아왔던 선지자와는 심하게 다른 외모였지만. 허연 수염이 땅에 닿도록 나이를 먹은 노인이 아니라, 그와 매우 가까웠던 사람과 닮았다.

"그러니까 긴장 푸시죠. 우리는 레노우에 무사히 도착할 거예요."

그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뭉치를 아티론에게 던졌다. 아티론은 상반신을 살짝 비틀어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품 가득히 눈뭉치를 끌어안고 있는 유즈를,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목적지를 가벼이 입에 올리지 말게."

"아……죄송합니다."

이번 일을 성공할 확신이 든다고 할지라도, 느긋하게 유즈와 눈싸움을 할 만큼 아티론의 긴장이 풀어진 건 아니다. 그는 풀이 죽은 유즈를 뒤로 한 채 일행들에게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지팡이를 쥐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유즈의 어깨가 축 처져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고비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여러가지 묻고 싶은 말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더라도, 지금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아티론 백작은, 노토스 대륙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국가이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론트 제국의 내륙 수도권을 점령해야 한다.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부하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건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되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번 일은 성공해야만 한다.

'나라면 할 수 있어. 해내야만 한다.'

아티론은 기운 빠진 유즈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마음 속으로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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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


LESS의 잡담이었습니다.



ps) 여기 텍스트큐브에 올리는 토막글은 딱히 하나의 줄거리로 연재하는 게 아니예요. 그냥 자유롭게 글을 쓰면서 창작욕을 해소하는 겁니다. 그림 하나 띄워놓고 거기에 맞는 글을 쓰면 필력이 상승하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잔머리로 해 보는 겁니다 ^^;;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그림과 함께하는 토막글 1


"맙소사."

피슨은 짧게 탄식하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두드렸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여기가 정말 대집행관(代執行館)의 지하란 말인가?"
"네. 우리를 굽어살피는 저 뤼에트 여신상처럼 분명한 진실입니다."

투영 술식이 무사히 성공했음을 확인한 주교는 담담하게 보고했다. 그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는 피슨의 모습은, 동방에서 들여오는 색유리처럼 뒷배경이 투명하게 보였다. 아마 자신 역시 마찬가지리라. 주위의 그림자를 빌어서 의식을 옮겨담는 술식은 어렵고 위험한 만큼 대단히 유용하다. 주교는 피슨과 함께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이끼가 잔뜩 슬은 벽의 그림자가 발 뒤꿈치에서 진득하게 떨어져나간다.

"대집행관의 정문은 비록 성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후면은 깍아내리는 절벽이옵니다. 비록 지하에 건설한 공간이라고 할 지라도, 자연광을 안으로 들이는 건 간단한 일이겠지요."
"그런가……. 선대 주군들은 지나치게 방심했군. 비록 수도의 외곽지역이라고는 해도 이 건물은 정교의 성지일 터. 보아하니 이 공간 역시 오랫동안 방치된 듯 한데,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에 이교도가 있었던 것인가?"

바론트 제국 정교의 주 교리는 유일신이다. 비록 황실법관의 수호상으로 인정받을 만큼 널리 알려진 뤼에트 여신이라고 할 지라도, 피슨의 눈에는 흘러간 고대신앙의 잔류일 뿐이다. '종교관 하나는 반듯하게 세워졌구먼.' 주교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 반듯한 날은 언젠가 자신의 턱 밑을 겨누겠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만 수 개월 전까지는 이 곳을 다듬은 손길이 느껴집니다. 덩쿨식물은 수시로 제거해주지 않으면 금새 벽면을 뒤덮어버립니다. 아직 여기 홀은 어느정도 단정되어 보이니, 가까운 과거에 누군가가 줄기를 쳐냈다는 걸로 생각합니다."

깊은 수로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주교의 음성이 쓸쓸한 홀을 울린다. 피슨은 말없이 여신상을 올려다보았다. 뤼에트 여신의 등에는 비대칭 날개가 돋아있다. 보다 높이 솟아있는 쪽은 불의, 다른 한 쪽은 정의를 뜻한다고 신화학자들은 말한다. 신의 세계가 될 수 없는 인간의 세계는 숙명적으로 불의가 강한 세계라는 인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참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피슨은, 축축한 돌이끼와 담쟁이덩굴이 휘감긴 벽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아름다운 홀이군. 그렇지 않은가, 케즈너 주교."
"예? 아아, 네."

허를 찌르는 질문에 무의식중에 대답한 주교는, 곧 자신이 내뱉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교를 추앙하는 쪽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미추는 선악과 분리할 수 없다. 불의에 기울어진 이교는 아름다울 수 없고, 아름다워서는 안된다. 그런데 자신은 이교도의 비밀 본거지를 감히 '아름답다'고 칭했다.

"나는 제국의 모든 백성들을 사랑하고 싶네. 그들의 집에 웃음소리를 가져다주고, 그들의 오크에 포도주가 마르지 않기를 원해. 하지만 그들 중 몇몇은 나의 사랑을 거부하고 있어.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거지……. 응. 거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닐텐데 말이야. 안 그런가?"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억겁의 세월이 쌓인 바론트 제국에 이교도라는 덩굴이 기어오르고 있네. 덩굴이란 건 참 교묘한 생물이지. 자신들을 떠받혀주는 존재의 목을 서슴지 않고 조르니 말일세. 그 이전에, 나는 그들의 목을 쳐내야 한다."

주교의 말을 들은 피슨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들거리는 그림자 팔을 앞으로 내밀어, 벌린 손을 주먹쥐었다.

"키르(Kirr)와의 전쟁을 끝낸 후에는 가지치기를 할테니 당신은 수도 안의 모든 이교도를 잡아들이도록. 그리고 이 홀은 불태우겠다. 대집행관과 함께, 신에게 선물해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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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

LESS의 잡담이었습니다.